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이휘스레브 2세 (문단 편집) === 쾨세다으 전투 (1243년) === 몽골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케이휘스렙은 셀주크 정규군과 튀르크멘 보조병은 물론, 주변 제후들에게도 병력 파견을 요구했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는 1400명, [[트라페주스 제국]]은 200명, [[압하지아]] 공국은 3000명, 알레포의 아이유브 왕공은 1000명의 기병대 제공이 청구되었다. 그중 몽골과 협상에 나선 아르메니아를 제외한 4200명의 기병이 술탄에 합류하였다. 1243년 봄, 시바스에 6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하자 케이휘스렙은 동진하여 에르진잔과 [[귀뮈쉬하네]] 사이의 쾨세 다으 (대머리산)에서 3만의 몽골군과 조우하였다. 바이추는 거짓 후퇴 작전을 펼쳤고, 의욕이 넘치던 케이휘스렙은 원로 장군들의 반대에도 (조지아 부대를 포함한) 2만 정예병을 보내어 몽골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철수하던 몽골군은 셀주크 군이 지치자 말머리를 돌려 그들을 포위하여 섬멸하였고, 압하지아 왕공 다르빈 셰르바쉬데가 전사하였다. 이를 지켜본 나머지 군대는 흩어져 도주하였고, 케이휘스렙 역시 [[토카트]]의 보물과 하렘을 챙겨 [[앙카라]]로 피신하였다. 몽골군은 시바스와 카이세리를 점령하였고, 뒤이어 콘야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후 바이추는 아제르바이잔의 무간 평원으로 철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